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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6월 3일, 일간스포츠, 조형적 표현속에 담긴 꿈과 환상

언론보도

by 구로 김영환 2024. 2. 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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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적 표현속에 담긴 꿈과 환상


그의 화실엔 이젤이 없다. 1백호는 됨직한 캔버스를 벽에 받치어 놓고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품들은 맨바닥에 뉘어놓은 채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화가를 지망하는 햇병아리 화학도, 그림깨나 그린다고 하는 고등학교 미술반원만 되어도 거의 빠짐없이 준비하게 마련인 이젤... 그러나 중견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는 김영환 화백은 아직까지도 그 흔한 이젤을 갖고 있지 않다. 못갖고 있는 것일까, 안 갖고 있는 것일까. 
역시 가난한 화가이기는 하지만 이젤 하나 준비할 수 없을이만큼 그의 생활이 각박한 것은 아니고 이젤없이 맨바닥에 화판을 깔고 그림을 그린 것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너무도 불우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일거예요. 누구나 자기 자신을 불운하다고 약간은 자학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우리 세대만큼 불운한 세대도 없다고 생각해요. 식민지에서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그러다가 전쟁에 시달리고 해방을 맞았고 다시 동족상잔의 전쟁에 휩쓰리고,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고 전쟁이 휩쓸어간 황량한 폐허에서 굶주려 가면서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물론 이 같은 역경을 혼자만 겼은 것이 아니고 온겨레가 함께 겪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불행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세대는 운명적으로 불운했다고 할 수밖에는 없지요."

 

고향이 원산인 김영환 화백은 1.4 후퇴 때 단신 월남하여 부산 피난시절에는 동가숙서가식하면서 지냈다. 굶주려가면서도 어쩌자고 그림만은 줄기차게 그려댄 그 무렵의 김화백에게 이젤이란 차라리 사치품이었다. 남들이 쓰다버린 목탄지를 주워 여백이 하나도 없이 새까매지도록 데상을 했고 그러다가 손이 퉁퉁부어 터지기도 했으나 그래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살아숨쉬고 있다는 생의 절규요 증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중섭화백의 그 유명한 은박지 그림이 나온 분위기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이선생은 나의 은사였어요. 고향인 원산에서 그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을 배웠고 피난지 부산에서 만나 함께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고생을 했어요. 저하고는 10년쯤 나이차가 있었지만 제가 이선생이라고 부르면 이놈아 이선생이 뭐야, 이형이라고 불러 하시곤 했어요. 이중섭 선생 예술도 예술이지만 그의 인간성이 더욱 좋았어요. 그분이 소를 많이 그렸지만 정말 소와 같이 온순하고 순진무구한 분이었어요."


캔버스를 구하지 못한 이중섭화백이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 옆에서 맨바닥에 종이를 깔아 놓고 손에 피멍이 들도록 기초를 닦은 김영환화백은 아직도 그때의 분위기가 몸에 배어있는 것 같기만 하다.
화실 한쪽에는 이중섭화백의 은박지 그림이 명함판보다 조금 큰 사진과 함께 액자로 되어 걸려있다.
이중섭씨의 영향을 강렬하게 받으며 화가로 성장한 김영환화백의 작품세계는 이중섭씨와는 또 다른 체질과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섭씨의 작품세계가 포비즘(野獸派)에 가까운것이라면 김영환화백의 작품세계는 이중섭씨의 포브적인 강렬한 색채와 굵은 선의 흔적이 남아있으면서도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막스 에른스트, 살바토르 달리 등에 의하여 시도된 미술운동이다. 기성예술과 회화의 파괴와 부정을 부르짖은 다다이즘의 과정을 거쳐 대두된 초현실주의는 마음 속 깊이 내재하고 있는 잠재의식의 표출과 이의 조형적인 표현을 내걸고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 논리의 단절, 사고의 비약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꿈과 환상의 경이와 충격이 무한히 펼쳐진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이론에 매료되었지요, 구라파의 초현실주의가 1차대전의 참화를 겪고 황량한 폐허의 암울한 전후의 분위기에서 현실극복과 분노의 돌파구로서 대두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차대전 전후의 그 같은 분위기는 6.25의 전란을 겪은 50년대초 한국의 분위기와 유사했어요. 제가 에른스트나 달리에 심취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소재가 갖는 외모, 그것이 지닌 실재를 자기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리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각박하고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불만이 너무도 크지 않았습니까. 현실에 대해 울부짖어 보고 불만스러운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을 향한 우리의 꿈을 캔버스에 표현하려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회화의 세계라고 할수있겠어요."

 

30호(가로 100cm 세로 65cm)의 '斷面(단면)'은 김화백이 1962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어느 바닷가, 수평선이 보이고 멀리 섬이 보이고 한쪽에는 해안의 구름이 비스듬하다. 파란하늘에 떠있는 조각구름의 형태로 보아 바람이 꽤 거센 것도 같다. 그러나 해안의 밧가 구릉이 비스듬히 올라가는 위에 눈을 지그시 감은 남자의 얼굴이 크게 클로스업되었다.
지그시 감은 눈밑에는 눈물이 점점이 맺힌 듯도 하고 거기서 다시 꽃가지가 뻗쳐 나왔고 꽃가지 위에는 이름모를 꽃이 피어있다. 위로부터는 옥을 꿰어달은듯한 것이 뻗쳐 나왔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에는 푸른 벌판을 꿰뚫고 지나 가는 고속도로, 그리고 그앞에는 사막과도 같이 메마른 불모지, 벌목된 나무둥거리가 살벌하게 서있고 그옆에는 바람결에 머리를 흩날리며 무언가 호소하는 둣한 여인이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왼쪽에는 대형 스크린도 같고 고적과도 같은 담벽이 서있으며 그 위에 횃불을 든 남자가 서 있다.
김영환화백은 '단면'을 현대인, 어쩌면 그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눈을 지그시 내려깔고 있는 남자, 그리고 바다 고속도로 벌판, 사막, 벌목된 나무등거리, 절규하고 호소하는 듯한 여인, 고적 위에 횃불을 들고 서있는 남자...
논리가 단절되고 상념이 마구 비약하지만 현대인이 살고 있는 기계문명사회(벌판과 고속도로) 그리고 메마른 정신세셰(사막)와 꿈에 그리는 이상향(바다)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피라미드 풍경'은 60호, 연두색 배경에 삼각형의 피라미드가 화면 중앙에 자리했고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과녁을 영상케하는 동심원, 피라미드 중간쯤에 봄구름이 화사하게 떠 있으며 하부로 내려가면서 피라미드의 색채는 흑청색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피라미드 하단에는 건물이 아들히 보인다.
지면과 피라미드가 맞닿는 부분서 환한 황색을 띤 색조는 아랫부분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연두색으로 짙어진다.
피라미드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알듯 모를듯 전해오는 것 같은 것이 이 작품의 분위기.
피라미드 정점의 동심원은 태양과 우주, 그리고 배경의 연두색 터치는 인간의 역사를 상징하려 했다는 것이 김영환화백의 설명이다.


74년작인 '흐르는 애정'은 10호짜리 소품,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얼굴이 화면 한가운데 자리하고 왼쪽에는 남자들의 겹쳐진 옆 얼굴, 오른쪽에는 목을 높이 쳐든 백조, 화면의 하단에는 조용히 강물이 흐른다.
여인과 남자들이 꿈을 꾸듯 한결같이 눈을 감고 있지만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낮아 호감이 간다.
꿂주린과 싸워가며 피나는 수련을 거친 김화백은 데상의 기본이 탄탄하고 구조가 안정되어 그림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흐르는 애정'은 다시적 원근법의 구도를 썼다. 한각도에서만 원근법을 쓴 것이 아니고 여러각도에서 원근법을 쓴 것이다.
김영환화백은 1928년 원산과 바로 이웃한 안변 출생. 원산에서 중학에 다닐 때 이중섭씨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그림을 배웠고 1.4후퇴 때 가족과 헤어져서 월남,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이 좋아서 고학을 하면서 홍익대 미술학부를 다니면서 화가수업을 계속 했다.
1956년 박서보, 김충선, 문우식씨 등과 함께 4인전을 열어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치를 든 김화백은 현대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등 서클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 무렵 그의 국전 등 기성화단의 권위를 부인하면서 고집스러운 젊은 혈기로 작품생활을 해왔으나 뜻을 같이하던 일부 친구들의 변모와 굴절에 실망하여 60년대 이후에는 일체의 화단활동을 중단하고 고독의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만을 그렸다.
생활의 책임을 부인에게 떠맡기도 그림만을 그린 그는 10여년 가까이 개인전을 열지도 않고 있다가 첫 개인전을 연 것이 1974년!
"요즈음 화가들은 모두 상병에 걸려 있어요. 무슨 상, 무슨 상하여 상도 많지만 이것을 얻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면 한심스러워요. 예술에 과연 상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외국에 나가 새로운 분위기에 접해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김화백은 방배동의 초라한 자택화실에 박혀서 현실과는 좀체 타협치 않는 고집스러운 자세로 환상의 세계를 펼쳐가고 있다. 이젤도 없이...

일간스포츠, 1977년 6월 3일(금요일)
글 오도광 부장, 사진 백형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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